요즘 자주 구경다니는 곳에서 한의학 비판하는 글을 많이 올리십니다. 돌아보기 전에 이오공감에 올라와 있는 걸 보고 놀랐는데.. http://fischer.egloos.com/4296533 漁夫 님께서 쓰신 글이네요. 과학하는 분들이 생각하는 입장을 그대로 대변한 내용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문제제기해주시는 분들의 글 내용은 저도 보면서 재미가 있고 도움이 많이 됩니다.. 특이하게 이 글은 이오공감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리플로 진흙탕 싸움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글쓴이분께서 감정적이지 않게 자제하신 영향이 크다 생각되네요.
사실 다른 분들이 같은 주제로 쓰시는 글들을 보면 이상야릇한 치료법으로 사고 친 사람 예를 들어서 거봐 역시 니들은 안돼~ 하는경우가 대부분이라서요. 그런 것 보고 반대로 의사가 잘못 진단하고 치료 실패한 얘기 들어서 거꾸로 비난하는 분도 종종 있지만 그런 논란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언제 끝이 나겠습니까.
아무튼 어부님 글도 그렇지만 다른 분들 모두 한의사들은 이천년 전에 나온 책 달달 외우면서 그래그래 음양오행.. 이건 맞는말이야 맞는말이지 아무렴 위대한 동양의 지혜.. 이러고 있는 걸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한의과대학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럴 줄 알고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그렇게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 수업 중에도 가끔 언급되는 내용을 예로 들면 어떤가 하면.. 이하는 논문 내용 발췌입니다.
"화타협척혈 침자극에 의한 손상 말초신경의 재생효과에 관한 연구" (한방재활의학회지 2008;18(4);39-61)
이 논문은 인체 대상 연구는 아니고 동물 실험입니다만.. 좌골신경을 손상시킨 흰쥐를 대상으로 화타협척혈 자침을 계속하여 손상 후 7일, 14일의 결과를 보니 'GAP-43 와 Cdc2 단백질 수준이 향상되고' 'Phospho-Erk1/2 단백질수준이 향상되고' '감각신경절의 신경돌기 가지 신장도와 단백질 발현이 증가했다' 는 것이 개략적인 논문의 결론입니다.
"숙지황 치료를 통한 손상된 척수신경섬유의 재생반응 향상" (동의생리병리학회지 2007;21(6);1569-1575)
비슷하다면 비슷한데.. 숙지황 투여를 통해 척수 조직의 ERK1/2 및 Cdc2 단백질 활성형 수준이 증가하고 신경교 손상이 제한되었으며 손상강 성상세포의 증식과 이동이 상승되었다... 는 내용입니다.
"소당환이 Streptozotocin으로 유발된 흰쥐의 당뇨에 미치는 영향" (대한본초학회지 2009;24(1);159-167)동물 실험 상 消糖丸과 glibenclimide을 각각 이용해 STZ-induced 당뇨병의 OGTT치, 크레아니틴 축적이 개선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논문입니다.
이상의 논문들을 거론한 이유는 딱히 저런 연구업적이 엄청나게 뛰어나서, 라기보다는 영어 논문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자가 많이 섞인 논문에는 심한 거부 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에...
아무튼.. 저런 연구는 한의사들이 한약과 침을 이용해 시행한 연구입니다만, 이런 것도 근거 없는 미신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사실 더 이상 뭐라 드릴 말씀이 없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저런 것도 말을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 미신으로 둔갑이 가능합니다.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모든 침술과 모든 약재, 모든 처방에 대한 RCT 연구결과가 마련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매우 널리 이용되는 오적산 같은 처방만 해도 이제야 이중맹검 연구 설계가 진행되고 있구요.. 이런 문제에 대한 건 다음에 다른 기회에 말하는 것으로 밀어두고 일단은 위에 나온 용어와 기반 개념에 대한 문제만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한의학 책에서 어떤 병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항상 처음에 '제가학설'이 등장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제일 처음에 "황제내경" 에서는 이 병에 대해 뭐라고 설명하고 어떻게 치료를 했는지 나오고, 그 다음 상한론, 그 다음 수당시대 한의사, 그 다음 금원사대가, 그 다음 명나라 청나라 때는 어떻게 했는지.. 수백 수천년 전 의사와 책 이름을 늘어놓고 그 사람이 어떻게 치료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의학은 이런 식으로 공부하지는 않죠. 한의학이 현대 과학과 정말 심하게 어긋나는 게 이런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컨대 의학적으로는 약 A를 썼더니 환자가 40%정도 치료되더라, 수십 년 지나서 약 B가 만들어졌는데 이건 70%가 치료되더라, 하면 B는 남기고 A의 이론은 틀렸다고 보고 폐기를 합니다. 반대로 한의학의 세계에서는 A를 줘야 하는 환자가 따로 있고 B를 줘야 하는 환자가 따로 있다, A를 줬을 때 낫지 않은 30%의 환자는 약을 준 사람이 진단을 잘못한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증상에 대해 정 반대의 이론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황제내경에서는 구토는 熱에 의해 생기는 증상이다 라고 하는데 이후에 이동원(금원시대 의사입니다)은 아니다, 구토는 寒에 의해서 생기는 증상이다, 라고 주장을 했어요. 그렇다면 과학적인 입장에서는 황제내경이나 이동원이나 둘 중 한 쪽은 틀린 것이고 맞는 것만을 따라가야 할 것 같은데, 둘 모두 '제가학설' 편에서 다루면서 "너도 맞고 너도 맞다"고 해줍니다. 위에서 말한 논리와 같은 식으로요. 寒으로 구토하는 사람도 있고 熱로 구토하는 사람도 있다, 하는 식이죠. 덕분에 현대 중국의 한의학 변증시치는 참으로 복잡다단하고 난잡합니다.
더욱 근본적인 부분에까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예도 허다합니다.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에는 기존 의학을 뿌리부터 비난하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 맥법이라고 하는 것은 증상을 수집하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니 기묘한 이치를 탐구할 필요는 없다.
- 황제내경을 황제가 지었다고 하는 것은 기이한 말로 미혹하는 것이나 이상한 기술을 좋아하는 자들은 그런 말을 하기를 좋아하니 딱히 심하게 탓할 필요도 없다.
이게 무슨 현대의 의사가 한 말이 아닙니다. 유명한 한의사라고 드라마에까지 등장한(;) 이제마가 이런 말을 했다는거죠.
겉으로 보이기에는 옛날 사람들이 말한 것만 맞다고 상고주의에 찌들어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계속 예전 사람들의 이론을 뒤집어 가며 발전한 것이 현대의 한의학입니다. 위에 몇 개 예를 든 논문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장차 먼 미래에는 신경세포의 단백질 어쩌구 하는 말이 숙지황에 대한 본초학 제가학설에 등장하게 될 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런 건 현대 우리 나라에서는 좀 다른 방향으로 문제가 전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위의 '과학'이라 붙인 부분처럼 설명을 하면 이미 한의학이 아니라고 하고, '미신'이라 붙인 부분처럼 설명을 하면 웃기는 소리를 한다는 반응이 나오는거죠. 계지를 이용해 진통한다는 설명을 하면 미신이 되고, 계지의 성분을 이용해 진통제를 만들면 현대 의학이 됩니다. 홍국을 습담 제거에 쓴다고 하면 미신이 되고, 스타틴을 고지혈증 치료에 사용하면 현대 의학이 됩니다. 사실 이 중간에는 사실의 발견보다 더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논문 축적과 검증이라는 과정이 끼어 있기는 하죠. 그런 과정을 거쳐 의학으로 편입된 내용은 더 이상 한의학과 연계가 인정되지 않고, 편입되지 않은 나머지 부분은 여전히 미신으로 남습니다.
지금에 와서 굳이 익숙한 의학이나 과학 대신 한의학을 선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현대 의학의 치료로 어디선가 부족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고 그 때문에 완전 전통 한의학식 이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한의대에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막상 입학하고 나니 생물학이니 생화학, 해부학을 강조하는 학교 분위기에 실망도 많이 하고 중도 탈락하는 사람도 종종 있죠. 현대 한의학계의 현실을 전혀 모르는 쪽에서는 한의사들이 현대 학문과 담 쌓고 지낸다고 비난하고, 현실을 아는 쪽에서는 한의사들이 의사의 영역까지 넘본다고 비난하는 게 지금 상황입니다.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을 공부하는 이유라면, 그런 현대 문명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통해 현대 과학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 전에 포스팅한 글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숙지황이 腎에 귀경하고 精을 보익하느니 하는 이야기는 현대적으로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론을 통해 숙지황의 뭔가가 신경세포 손상 회복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를 이용한 신약이 만들어진다면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의학을 부정하는 논리가 근 십수년 사이 몇 차례 변화해왔는데, 처음엔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고, 다음에는 간을 상한다는 것이었고, 이제는 현대 문명과 너무 이질적이라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은 장차 한의사들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차츰 불식될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침으로 유전병 고친다고 광고하고 주사 경분을 두세 달씩 먹이는 한의사는 비난하셔도 아무 관계 없고 저 역시도 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한의사와 한데 묶어서 이 이론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은 과장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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